외래, 번역문투, 우리글 뼈대까지 흔든다-한겨레신문-2006년 12월 6일
2006년 12월 6일 한겨레신문사의 한겨레말글연구소가 주관한 학술발표회가 있었다. 이 학회의 주제는 "우리글에 스민 외래, 번역말투"였는데, 나는 "영어 교육 영향과 우리글 속의 영어 번역문투"라는 논문에 대한 토론을 맡았다.
나는 토론에서, 번역상의 문제점을 “영어 교육”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고 주장하였다. “영어 교육” 때문이라기보다는 “문법번역식 영어 교육”, 혹은 “잘못된 영어 교육”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제대로 된 영어 교육을 실시했다면, 영어를 우리말 번역을 매개로 해서 이해하지 않고 직접 이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학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직역투 문장으로 써대는 것이 더 문제라고 보았는데, 다음은 내 원고의 일부이다.
문제는 학자 (혹은 지식인)들이 부자연스러운 직역투 표현을 글에서 남발하는 것이다. 이는 학자들이 스스로의 학문이나 사고를 하기보다는 외국의 이론을 번역하여 보도하는 이른바 “보도 기능”에 안주해 왔기 때문인데, 이런 사람들이 내용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남의 글을 직역투 문장으로 옮겨 설명하는 형식을 취해온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직역투 표현은 원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흔히 발생하며, 내용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한국어 표현 능력이 부족한 경우에 흔히 발생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직역투 표현 자체보다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명확하게 서술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더 큰 문제인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우리말로 명확하게 사고하고 명료하게 글쓰는 훈련, 즉 한국어 교육을 제대로 해야 한다. 명확하게 사고하고 명료하게 글쓰는 사람이라면 부자연스러운 직역투 문장을 거부할 것이 당연하므로, 한국어 교육을 강화해 이런 부자연스러운 직역투 표현의 위험을 최소화해야 한다.
다음은 이 토론회 내용을 보도한 한겨레신문의 기사이다 (기사 출처: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176631.html). -----------
“외래·번역문투, 우리글 뼈대까지 흔든다” | |
법률문장 등 일본어투 사회영향 크고 영어번역투 어색한 문장 갈수록 남발 ‘문체 바로잡기·순화 운동’ 필요성 제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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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말글연구소 학술발표회
우리 말글에 외래·번역문투가 낱말 차원을 넘어서 문법 요소와 문장 틀마저 헝클 정도로 깊이 스며들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이런 진단은 6일 ‘우리글에 스민 외래·번역문투’라는 주제로 열린 한겨레말글연구소 제2회 학술발표회에서 나온 것으로, △‘법률·실용문에 나타난 일본어 문투’(발표자 박갑수) △‘영어교육 영향과 영어 번역문투’(〃 이근희) △‘외래·번역문투 손질하기’(〃 최인호) △‘고종 국문쓰기 칙령의 국어사적 의미’(〃 김슬옹) 등 소주제 발표에서 공통적으로 지적됐다.
하지만 그 원인과 처방, 번역문투를 다루는 태도에서는 발표자와 토론자들의 견해가 엇갈리기도 했다. 이는 이 분야의 전면적인 연구·검토 뒤 엄정하게 짚어야 할 문제임을 보여준다.
본디 다른 나라 말을 우리말로 뒤치는 일이 번역이다. 우리말에서 번역의 역사를 살피면, 그 역사가 훈민정음 창제와 같이했음을 알 수 있다. 세종 임금이 훈민정음을 만들고서 딸 정혜공주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그 쓰임새를 시험하게 한 것이 이른바 한문으로 된 불경의 언해, 곧 불경을 번역하거나 이를 바탕으로 석가모니 연대기를 짓는 일이었다. ‘용비어천가’ 역시 온전히 조선식 글이라고 하기 어렵다. 즐겨 읽던 ‘두시언해’도 잘 뒤친 번역시였다. 이처럼 한문번역 역사는 훈민정음의 역사만큼이나 길며, 우리 문장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게 하는 밑절미가 된다.
우리 산문이 한문 문체에 흡수되지 않고 독자적인 말차례, 낱말, 말투를 간직하며 내려왔으나 한문투의 영향이 적지 않은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는 판소리를 비롯한 옛소설들에 스민 숱한 한문투들이 증명해준다.
우리 말글에 스민 일본어, 영어 문투=첫 번째 발표자로 나선 박갑수 교수(서울대)는 광복 이후에 만든 온갖 법률이 일본 것을 베끼거나 일제 때 것을 토씨 정도만 손질한 채 그대로 썼기에 나중에 새로 나온 법들마저 일본어 문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짚었다. 사실 민사소송법은 박갑수 교수가 다듬어 개정한 바 있다.
법률 문장은 일반 용어에도 영향을 주어 그 폐단이 적지 않다. 곧, 법률 문장은 온갖 행정문·실용문 등에 인용돼 직접적 영향을 끼치는 까닭이다. 박 교수는 낱말 차원을 제외하고, ‘~대하여’와 ‘~의’의 남용과 같은 잘못된 일본어 문투 사례로 40여 가지를 들었다.
이런 현실 아래 최인호 한겨레말글연구소장은 ‘외래·번역문투 손질하기’라는 발표문에서 보도문에서 두드러지게 쓰이는 ‘~에 의하면/~에 따르면, ~에 대해/~에 관해, ~에 의해, ~에 비해, ~을(를) 위해/~을 위하여’가 들어간 문장을 비롯하여 30가지를 추려 다듬은 글을 선보였다. 이는 한문투와 일본어 문투, 영어 문투가 뒤섞여 굳어져 쓰이는 보기들로서 이 정도만 손질해도 일상적인 보도문투에서 거슬리는 번역문투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박 교수는 외국어란 크게 보았을 때 ‘필요해서 차용하는 것과 위세에 밀려 차용한 것’으로 나누면서, 낱말이든 문법·문체든 위세적 동기로 스민 것은 원칙적으로 배제해야 한다고 봤다. 선별적 수용론을 주장한 것이다.
필요적 차용에 대해 토론에 나선 이수열(국어순화운동인)씨는 단호한 순화를 주장했다. 국어교육자들이 이 분야를 좀더 공부할 것과 제대로 된 국어교육을 주문했다. 그는 특히 “변화에 순응한다는 핑계를 내세워 외국어 단어를 남용해 우리말을 죽이거나 서투르게 번역한 문투로 글을 써서 한국인다운 사고체계를 무너뜨리는 짓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어를 배우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영어 공부를 많이 하면서 날이 갈수록 그것이 우리말에 끼치는 영향을 가늠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라는 말도 나왔다. 토론에 나선 한학성 교수(경희대)는 학자들이 어색한 번역 또는 직역투 문장을 남발하는 것이 문제라고 짚었다. 이른바 ‘보도 기능’(소개 학문) 위주로 학문을 일삼는 학자에게 잘못이 있다고 봤다. 특히 그는 이를 극복하자면 한국어 교육을 제대로 해야 하고 영어교육 방식도 혁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곧,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잘못된 믿음을 버리고 독자적인 영어교육 쪽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새로웠다.
최 소장은 “번역한 글이야 한수 접어서 이해하며 읽으면 되지만 번역과 상관이 없는 우리글에 스며든 번역문투가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한문-일본어-영어가 서로 얽혀 보도문에 스민 번역문투 사례들을 내보인 뒤, 사람들이 익숙해진 바가 많지만 여전히 우리글 속에서는 물에 기름처럼 떠돌고 있으므로 대대적인 문체 바로잡기(또는 문체반정) 운동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토론에 나선 정상훈 교사(과천외고)는 지나친 관용어 손질이 주는 거부감, 자연스런 변화에 무게를 실었다.
한편, 이날 김슬옹 교수는 ‘고종의 국문 쓰기 칙령’의 영향과 19세기 말의 국어정책에 따른 국어사용 현실을 짚었다.
안창현 기자 blue@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