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영어” 성경 전래지?
마량진 기독교 성역화 추진위원회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최근 그 단체에서 충남 서천군 마량진리에 세계 최고 높이의 십자가상을 건립할 계획이라고 보도되었다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975955 참조).
이들이 마량진을 성역화하려는 이유는 이곳을 한국 최초의 성경 전래지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들은 1816년 9월 서해안 일대를 탐사한 영국 군함 라이라호의 함장 배즐 홀이 마량진 포구에서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비인 현감 이승렬에게 성경을 전해줬음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마량진에 세워진 한국 최초 성경 전래지 비>
1818년에 출간된 배즐 홀의 저서 Account of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and the Great Loo-choo Island 41쪽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When looking over the books in the cabin, he was a good deal taken with the appearance of a Bible, but when offered to him he declined it, though with such evident reluctance, that it was again shewn to him just as he was pushing off in his boat, and he now received it with every appearance of gratitude, and took his leave in a manner quite friendly.
(선실 안의 책들을 둘러보면서 그는 성경 책에 끌린 듯했다. 그 책을 주려 했지만 받지 않았다. 아쉬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래서 그가 탄 배가 떠나려할 때 다시 주었다. 이번에는 고마워하는 기색이 분명하게 그 책을 받았다. 그리고는 아주 다정한 표정으로 작별 인사를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1816년 9월에 이곳에 성경이 전래된 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성경”이었음을 받는 사람이 알았는지와 그것이 한반도에 전해진 “최초”의 성경인지는 다른 문제이다. 이와 관련해 조선왕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먼저 한문으로 써서 물었더니 모른다고 머리를 젖기에, 다시 언문으로 써서 물었으나 또 모른다고 손을 저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참 동안 힐난하였으나 마침내 의사를 소통하지 못하였고, 필경에는 그들이 스스로 붓을 들고 썼지만 전자(篆字)와 같으면서 전자가 아니고 언문과 같으면서 언문이 아니었으므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좌우와 상하 층각(層閣) 사이의 무수한 서책 가운데에서 또 책 두 권을 끄집어 내어, 한 권은 첨사에게 주고 한 권은 현감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펼쳐 보았지만 역시 전자도 아니고 언문도 아니어서 알 수 없었으므로 되돌려 주자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기에 받아서 소매 안에 넣었습니다. [---] 첨사와 현감이 배에 내릴 때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가지고 굳이 주었는데, 작은 배에서 받은 두 권과 합하면 세 권입니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B%A7%88%EB%9F%89%EC%A7%84+%EC%9D%B4%EC%8A%B9%EB%A0%AC&keyword=%EB%A7%88%EB%9F%89%EC%A7%84+%EC%9D%B4%EC%8A%B9%EB%A0%AC 참고)
뒤에서 받은 책이 성경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책을 받은 사람이 그 책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도 이 사건을 종교적 의미의 “성경”이 전래된 사건으로 보아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이 날 성경이 조선인에게 전해진 것 자체는 사실이므로 이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다. 문제는 그것이 한반도에 전래된 “최초”의 성경이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그 이전에 이미 한반도에 전해져 있었다.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 세자는 인조 23년(1645년)에 돌아오면서 독일인 아담 샬로부터 천주교 서적과 천주상을 구해왔다. 신앙으로서의 천주교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프랑스 신부 그라몽(Grammont) 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왔을 때를 그 시작으로 본다.
이렇게 보면 성경은 배즐 홀의 배가 서해안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한반도에 전래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의 천주교도들이 성경도 없이 신앙 생활을 했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이 때의 성경은 한문으로 된 성경이었을 것이다.
배즐 홀이 전해준 것은 최초의 성경이 아니라 최초의 “영어” 성경이다. 그것도 받은 사람은 성경인지도 모르고 받은 것이다. 따라서 마량진의 비석은 “한국 최초 영어 성경 전래지”로 고쳐 적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 그것이 우리나라의 개신교 중심, 영어 중심 문화의 단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나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