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00년 2월 14일부터 21일까지 덴마크를 방문했다. 나는 덴마크를 이때 처음으로 방문했는데, 방문 목적은 덴마크 출신의 탁월한 영어학자 오토 예스퍼슨에 대한 자료 조사와 함께 덴마크 영어 교육 현장을 직접 답사하기 위해서였다.
그 즈음해서 조선일보는 <영어가 경쟁력>이라는 제하의 특집 기사를 연속해서 내보내고 있었는데 (이 때는 조선일보가 서울대와 공동으로 텝스 사업을 벌이던 시기이기도 함), 어느 날인가 기사 중에 "TESOL"이 "Teaching English as a Second Language"라고 잘못 소개되어 있는 것이 내 눈에 띄었다.
나는 담당 기자에게 잘못을 지적하는 이메일을 보내면서, 내가 본 덴마크 영어 교육의 실상을 정리해 함께 보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다른 기자 하나가 전화를 걸어와 그 글을 실겠다는 뜻을 전달해 왔다. 다만 그 글을 기행문 형식으로 고쳤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원래의 내 글을 나름대로 고쳐 보냈으나, 자신들의 의도에 잘 안 맞았는지 그 기자는 나에게 인터뷰를 추가로 요청하면서, 그 인터뷰 내용과 내 글을 바탕으로 자신이 글을 고쳐보겠다고 했다.
나는 이에 동의하였고, 얼마 후 그 기자는 자신이 고친 글을 나에게 보내왔다.
나는 그 글에서 명백히 잘못된 부분만을 고쳐줄 것을 요청하는 선에서, 그 글을 수용하였다. 그런데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요청이 반영되지 않은 채 기사가 나와버렸다.
내가 고쳐달라고 요청한 내용이란, 글의 흐름을 부드럽게 하기 위한 몇 가지 사항들과 함께 "국민학교"(Folkeskole) 및 "대학교"(Universitet)에 해당하는 덴마크어 표현이 잘못되었으니 수정해 달라는 것, 그리고 내가 "영어교육 전공자"로 소개되어 있는 것을 "영어 전공자"로 수정해 달라는 것 등이었다.
원래의 내 소속이 "영어교육과"이다 보니, 담당 기자가 "영어교육"이 내 전공이라고 쓴 것인데, 나는 한국 사회에서 이런 식의 실수가 어떤 비아냥을 야기할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꼭 고쳐달라고 부탁했던 것이었다.
나는 대학원에서 촘스키의 생성문법이론으로 박사 논문을 썼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이론언어학 전공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언어습득이론이나 영어교육에 관심을 갖고 공부했다 하더라도, 또 내가 실제로 영어교육과 교수로서 우리나라 영어교육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진지한 고민을 해왔다 하더라도, 나 자신이 내 전공을 "영어교육"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러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다. (나는 내 전공을 "영어학"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언어학자"나 "영어교육학자"보다는 "영어학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영어학자로서 우리나라 영어교육에 기여할 부분을 찾고 싶어한다.)
그런데 기사가 그렇게 나가고 보니, 내가 무슨 엄청난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나를 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의 반응은 영어교육을 전공하지도 않은 사람이 영어교육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우리나라 영어교육을 주도하는 세력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나는 이들이 스스로를 영어교육 전공자로 자처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영어교육에 대해 말하면 안 된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우선 우리나라 영어교육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자격이 따로 있다는 생각부터 동의하기 어렵다.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나라 정치나 경제에 대해서는 정치학이나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들만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인가? 또 탈많은 우리나라 교육에 대해서는 교육학 전공자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인가?
우리나라 영어 문제는 영어교육 전공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어교육 전공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이 영어교육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식의 태도를 보일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잘못을 진지하게 반성하고, 누가 하는 말이든지 그 말이 옳고 또 타당하면, 그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옳으냐"이지 "누가 말하느냐"가 아니지 않은가?
아무튼 나는 이 글이 덴마크 영어교육에 대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 글이라고 생각한다. 또 이 글 때문에 우리나라 영어교육이 역할모델로 삼아야 할 나라는 영어가 '모국어'인 영국이나 미국이 아니라, 영어가 '외국어'인데도 국민들 상당수가 영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덴마크나 네덜란드여야 한다는 인식이 국내에 생기게 되었다고 자부한다. 비록 글 안에 기자의 입김이 많이 들어와 내 본래의 어조가 상당히 변색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기사에 실린 사진에 대해 한 마디해야겠다. 이 사진은 내가 코펜하겐에서 초등중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기관(Seminarium)을 방문했을 때, 거기서 얻은 자료에 수록된 사진이다. 당시 조선일보 기자는 덴마크 영어 수업 사진을 실었으면 한다며 나에게 도움을 요청해왔다. 해서 그 자료를 빌려주었는데, 이 자료를 돌려받는 데 무척 힘이 들었다.
기사가 일단 나간 후, 글을 요청할 때 보였던 정중한 태도가 어디로 갔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되는 기자를 나는 이 때 처음 경험하였다.
참고로 그 기자는 잘못된 부분을 인터넷판에서만이라도 고쳐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현재까지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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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00년 3월 10일자에 게재됨.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하기 바람.
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0030970276
다음은 게재 내용임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잘못된 부분이 그대로 실려 있음).
- [영어가 경쟁력] 덴마크 영어교육/영어드라마 방영…회화 '술술'
- 입력 : 2000.03.09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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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덴마크의 초등학교, 영어 교육을 받은 교사들이 자연스럽게 수업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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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은 첫눈에 나 같은 외국인에게는 대단히 불편한
도시로 보였다. 거리에는 온통 덴마크어로 쓰인 간판뿐이었으며, 사람들은 서로 덴마크어로만
이야기했다. 덴마크 영어교육을 개혁한 영어학자 예스퍼슨에 대한 자료 수집과
함께 유럽서도 첫손 꼽는 덴마크 영어교육의 성공 현장을 보러 갔던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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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첫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나는 덴마크 영어의 힘을 곧 실감하게 됐다.
그리고 1주일을 지내는 동안, 영어는 버스기사에게나 중고서점 주인에게나
뒷골목 조그만 식당 종업원에게나 척척 통했다. 이번에 만난 덴마크 학자들은
국민 대부분이 9학년(우리나라의 중3에 해당)을 마치면 일상적 대화에서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영어교육을 하고 있으며,
학교 영어교육 외의 사교육은 특수한 경우 아니면 거의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순전히 6년 정도의 공교육만을 통해서 말로 하는 영어
의사소통 능력을 구비하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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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수준차는 있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을 얻거나 이루는 데는 아무
불편이 없었다. 시내버스를 탔을 때였다. 코펜하겐 대학에 가려면 두 번
갈아타야 했다. 운전기사에게 갈아탈 곳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자연스러운
영어로, 그곳에 가면 알려줄 테니 걱정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물론 텔레비전
앵커처럼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 사정을 생각하면 그 정도면 넉넉한
합격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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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영어의 힘은 보통 사람들의 ‘듣고 말하는’ 능력에 있었다. 영어가
공용어도 아니고, 공교육 이전부터 영어를 배우러 여기 저기 쫓아다니는 풍토도
아닌데, 무엇이 이 같은 힘을 만들었을까. 영어교육 전공자로서 1주일이란 짧은
관찰기간이었지만 여러 각도에서 들여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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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언제나 영어 방송을 접할 수 있는 공중파 텔레비전과 초등·중학교
과정인 국민학교(포크슐레) 교사를 키워내는 교육대학(세미나리움)의 영어교사
양성 등 튼튼한 ‘인프라’가 큰 재산이었다. 게다가 영어로 말하고 듣는 능력이
큰 자산임을 인정하는 국민적 범위의 ‘영어 성취동기’도 큰 몫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 초등학교 영어교사는 “덴마크는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영어를 배워
다른 나라 국민들과 교류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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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영어교육은 93년부터 4학년으로 시작 연령이 낮아졌다. 예전에는
5학년부터 시작했으나 “말하기·듣기뿐 아니라 글쓰기까지 제대로 가르치려면
한 해라도 먼저 시작하는 것이 좋다는 연구가 있어 그처럼 바뀌었다”고 덴마크
대학 영어 교수는 전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모든 영어교과목은 영어로
진행된다. 초등학교 영어교사는 종합대학(유니버시티) 영어과 출신이 아니라
교육대학 출신 일반 교사. 영어 등 4개 과목을 전공하게 돼있는 교육대학에서
영어과목을 배운 것이 전부다. “영어시간에 영어 소설이나 시 등을 교재로
삼아 수업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익히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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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도 ‘영어교육’ 영향이 크다는 말에 한번 켜보았다. 덴마크 국내
텔레비전 방송에서 영어로 드라마를 보여주고 있었다. ‘맥가이버’처럼
한국에서도 이미 오래 전에 방송된 것도 있고, 미국서 한창 인기있던 ‘배이
워치’도 있었다. 화면에 자막이 나오면서 대사는 영어 그대로 들려주고
있었다. 뉴스시간에는 CNN, CNBC 같은 미국 뉴스 프로그램이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드라마를 영어로 방영하니까 학생이나 일반
시민이 이를 즐겨봅니다. 자막이 나오니까 내용을 다 알아듣지 못해도 내용을
즐길 수 있지요. 그러면서 무의식적으로 영어를 체득하게 되지요.” 코펜하겐
대학의 교수 한 사람은 이런 방식이 한국에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느냐고
되물었다. 귀로 들어 입력되는 영어를 축적하고, 눈으로 그 뜻을 이해하면
들은 내용이 ‘이해가능한 입력(comprehensible input)’이 되어, 무조건
듣기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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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코펜하겐 대학 영문과의 영어 구사력 심사도 인상적이다.
전공필수·선택 여러 과목을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이지만, 실제적인 영어 구사력으로 구술능력(oral proficiency)과
작문력을 철저히 시험하는 것이다. 에세이나 시에서 제대로 된 영어가 아닌
경우 아예 심사 대상에서 제외한다. 영문과 졸업생이라면 기본적인 전공
지식을 갖는 것이 물론 중요하지만 영어로 그것을 쓰고 말하는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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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학성·경희대 영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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