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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내 이야기

우리나라 영어학계 유감

나는 대학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다 미국 유학을 갔기 때문에 국내 대학원이나 학회 문화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미국에서 촘스키의 생성문법을 공부하고 돌아와 “한국언어학회”라는 곳에 처음 가보니 학회에서 하는 일이 주로 당시의 이론을 소개하는 정도였다.

 

나는 그런 일은 대학원 수업에서 해야 하며 학회에서는 무언가 새로운 주장을 펴고 또 그에 대한 토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식의 학회 운영을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국내 생성문법의 대가라고 불리던 어느 교수를 찾아가, 우리도 미국에서처럼 같은 전공을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토론다운 토론을 해보자고 제안하였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한국생성문법학회”이다 (이 학회의 영문 명칭도 내가 제안한 것임).

 

나는 한동안 이 학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런데 순수하게 모여 토론하던 이 모임이 어느새 눈에 보이지 않는 줄을 중심으로 이상한 계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를 실망스럽게 생각하던 나는 1990년대 중반 자연스럽게 이 학회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내 관심 분야도 촘스키에서 예스퍼슨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이즈음 나는 한국에서의 영어학이 어떠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처럼 미국에서 언어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대부분 미국의 언어 이론을 한국어에 적용하는 식의 연구를 하는 관계로 영어 연구보다는 한국어 연구를 주로 하는 실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나의 고민에는 1988년 서울대 어학연구회에서 만난 어느 노교수의 영향도 있었다. 이 분은 국어학을 하시는 분으로 처음 만난 나에게 대뜸 우리나라 영어학 교수들은 전부 엉터리라는 말부터 해댔다. 이유인즉슨 영어학 교수라는 사람들이 영어 연구는 하지 않고 한국어 연구만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한국어 연구로 보편 문법 탐구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분의 말을 선뜻 수긍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분의 질책이 가슴에 와 닿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언어학회”가 아닌 “영어학회”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그것은 영어학회가 있으면 영어학 교수들이 자연스럽게 영어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 후 나는 내 책을 통해서도 영어학회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2000년을 전후하여 “영어학회” 설립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나와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주축이 된다는 소문에 나도 이 학회 설립에 참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참여를 권유하는 것이 명백한 시점에서도 나에게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영어학회 설립을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진 교수 중 한 분을 찾아가 참여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랬음에도 나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영어학회는 창립되었다.

 

그 후 전국의 모든 영어학 교수들에게 학회 입회를 요청하는 무작위 메일이 나에게도 오기는 했지만, 나는 학회 가입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영어학회 설립 직후인 2001년, 내가 공부한 텍사스대의 영어사 교수인 케이블 교수가 이 학회의 초청을 받아 한국에 오게 되었다. 1997년-1998년 안식년을 보낼 때 이 분과 좋은 시간을 가진 적이 있는 나는 이 분을 뵈러 그 학회에 가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그 학회의 회장이 “촘스키와 예스퍼슨의 아름다운 만남”을 그 학회가 추구한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는 것을 듣고 실소를 금하기 어려웠다. 촘스키와 예스퍼슨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해온 나만은 유독 그 학회 설립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었다.

 

한 두 해가 지난 즈음 비슷한 이름의 다른 학회가 예스퍼슨 기념학회를 개최하였다. 이 시기는 이미 내가 예스퍼슨에 관해 몇 편의 논문을 냈을 때고, 또 번역서도 냈기 때문에 나름대로 국내에서는 예스퍼슨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하는 사람 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을 때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학회로부터도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나중에 누군가가 프로그램을 보내주어 그런 학회가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프로그램 안에는 국내 수십명의 학자들이 예스퍼슨에 대해 발표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내 근처에 있는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나는 그들이 언제 예스퍼슨에 대해 그렇게 관심을 가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평소에 별 관심이 없었더라도 날짜를 정해놓고 수십명이 갑자기 특정 학자에 대해 논문을 쓸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가 과연 제대로 된 학문을 하는 사회일까? 그러면서도 유독 그 학자에 대해 관심을 두고 꾸준히 연구해온 학자에게는 논문 발표 의사마저 타진하지 않는 그런 사회, 그런 사회가 과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회일까?

 

그러면서도 무슨 대단한 학문이나 하는 것처럼 행세하는 소위 주류 영어학 교수들을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나는 참으로 그들을 이해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