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구 소동이 일단 막을 내렸다. 청문회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은 실망, 아니 절망 그 자체였다. 어쩌면 이와 같은 결말을 가장 반길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일지도 모르겠다. 총리다운 총리, 장관다운 장관을 그가 전혀 원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이완구 소동을 보면서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우선 보도에 따르면, 그는 1971년에 최초 신검을 받고 현역 판정을 받았으나, 1975년에 2차로 신검을 받으면서 그것도 재검 끝에 보충역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만 20세가 되는 해에 신검을 받았다. 그리고 신검 결과 현역 판정이 나오면 곧바로 입영하게 되어 있었다. 일단 현역 판정이 나온 후 입영을 연기하는 것은 정말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늘날처럼 현역 판정을 받고도 상당 기간 동안 입영을 연기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대학이나 대학원 재학생은 재학 중에는 신검을 연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휴학을 하거나 졸업을 하는 등 소위 학적 변동이 생기면 곧바로 신검을 받아야 했다. 다시 말해 당시 대학생들이 군대를 늦게 갈 수 있었던 것은 현역 판정 후 입영을 연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신검을 연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생이라 하더라도 일단 신검을 받고 현역 판정을 받게 되면, 절차에 따라 대개 1년 내에 입영을 해야 했다.
이제 이완구의 경우를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그는 대학 1학년이던 1971년에 신검을 받고 현역 판정을 받았다. (당시 고시 준비를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가 신검을 연기하지 않은 것은 의문이다. 그가 1950년생인 것을 보면, 그는 아마도 재수 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1970년에 신검을 받았어야 했다. 그런데 왜 그 해에 신검을 받지 않았는지도 역시 의문이다.) 아무튼 당시 관례대로라면, 그는 신검일로부터 1년 이내에 입영을 해야 했다. 그런데 그는 1975년에 재검을 받게 된다. 그가 1971년에 현역 판정을 받았음에도 왜 1975년까지 입영명령서를 받지 않았는지 반드시 해명이 필요하다. 대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는 그 당시 4년 간이나 입영을 연기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입영명령서가 발부되었음에도 의도적으로 수령을 거부한 것은 아닌지, 아니면 병무청 담당자 등에 부탁해 입영대상자 명단에서 누락되도록 하게 한 것은 아닌지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또 한 가지 의문은 그가 1971년에 고향이 아닌 서울, 그것도 수도육군병원에서 신검을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본적지에서 신검을 받았다. 이완구가 1971년에 서울에서 신검을 받았다면, 혹시 당시 그의 본적이 서울이 아니었을까? 그의 집안은 본적지를 옮긴 적은 없을까? 아니면 무슨 다른 특별한 이유나 목적이 있어 수도육군병원에서 신검을 받은 것은 아닐까? 당시에는 서울 사람들도 대개는 본적지 주소 근처에서 신검을 받았다. 수도육군병원에까지 가서 신검을 받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언론은 이런 의문점들에 대해 심층적으로 취재해서 보도해 주어야 한다.
이완구는 입영을 한 적 자체가 없다고 청문회에서 주장했다. 진선미 의원은 그가 입영을 한 후 귀향 조처를 받았다는 취지로 질의했다. 어느것이 사실인지 최소한 그 정도는 언론에서 파악해 보도해야 하는 것 아닐까? 대한민국 남자치고 입영을 한 적이 있는지 없는지를 헷갈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만에 하나, 그가 입영을 한 적이 있음에도 그렇게 말을 했다면, 그는 그것만으로도 당장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그가 김치찌개 식사 자리에서 기자들에게 했다는 말이 다시 생각난다. 그런 말을 들어도 싼 언론인지 아닌지는 국민들이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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