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처음 출간된 것이 2000년 10월이니 벌써 9년전의 일이다. 이 책이 출간될 즈음의 사정은 이러하다.
2000년 5월 중순, 나는 근처의 친구들과 오랜만에 자리를 같이 하였다. 이 자리에는 나와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박균성(법학)을 비롯하여, 이웃인 한국외국어대에 근무하는 김용민(정치학), 맹주억(중국어), 반병률(국사), 탁석산(철학), 그리고 당시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로 있으면서 외대에 출강하던 서동만(정치학)이 모였다. (서동만은 그 후 상지대로 자리를 옮겼고, 노무현 정부 시절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일하기도 하였는데, 얼마전 폐암으로 아깝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외대 근처의 한 중국집에 모인 우리들은 잔을 주고받아 가며, 이미 수십년전이 되어버린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당시의 남북문제에 이르기까지, 자리를 옮겨 가며 밤늦도록 종횡무진으로 이야기꽃을 피워댔다.
이 날은 특히, 모인 친구들 중 유일하게 그때까지 전임이 되지 않은 탁석산이 그가 공들여 쓴 저서 『한국의 정체성』을 들고 나와, 결과적으로 그를 위한 출판기념회 자리도 겸하게 되었다. 그 날 그는 농담처럼 우리 모두를 자기 저서를 낸 출판사에게 소개할테니 각자 책 한 권씩 쓸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말했었는데, 우리는 이 말을 별로 마음에 담아 두지는 않았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나는 책세상의 김광식 주간으로부터 영어 공용어화에 대한 책을 하나 낼 수 없겠느냐는 제의를 받게 되었다.
당시에 벌어지던 영어 공용어 논쟁을 본말이 전도된 소모적 논쟁이라고 생각하던 나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고, 그 해 여름 방학 중에 집중적으로 작업을 해 원고를 마치게 되었다.
이 책은 출간 당시 몇몇 언론사가 관심을 가져주었고, 또 우리 사회에서 영어 문제가 불거질 때면 새롭게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참고: 이 책이 출간된 당시의 국민일보 인터뷰 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5&aid=0000030849)
2008년 2월에 5쇄가 나왔다.
다음은 이 책의 앞머리에서 내가 한 말이다.
처음 본격적으로 영어 공용어 논쟁이 벌어지던 1998년 7월, 그때 나는 국내에 없었기 때문에 직접 이 논쟁을 체험하지는 못했다. 당시 나는 미국에서의 1년 간 안식년을 마무리하느라 국내 소식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8월초에 귀국해서는, 바로 다음날 열 살 난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했기 때문에 내내 경황이 없어 그런 논쟁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 길이 없었다. 나는 아이를 죽일 뻔한 사고를 내놓고도 전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뻔뻔스런 운전자와 사경을 헤매는 아이 앞에서 우리 애가 가해자라고 우겨대는 경찰관을 보고 1년 만에 돌아와 맞닥뜨린 우리나라의 현실에 절망하고 있었다.
내가 영어 공용어 논쟁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1월, 일본에서 영어 공용어론이 대두된 직후 우리나라 언론들이 이를 대서특필하면서부터다. 나는 이 소식을 접하면서 영어 공용어론은 본말이 전도된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한다고 해서 모든 국민이 갑자기 영어를 잘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고, 국민 모두가 영어를 잘할 수 있게 되어야 비로소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그 후 덴마크를 방문하면서 더욱 굳어졌다. 토플 성적 세계 1, 2위를 다투는 이 나라는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지도 않고 거리 간판이나 도로 표지판에 영어를 병기하지도 않지만, 국민들 대부분이 기본적인 영어 구사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나라에서도 영어 공용어 논쟁이 벌어지지 않는데, 영어를 전공한 사람들의 영어 구사력마저 신통치 않은 우리나라에서 영어 공용어 논쟁이 나온다는 것은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덴마크 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우연히 어느 대학 영어학 교수가 텔레비전에 출연해 영어 공용어론을 주장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우리나라 영어 교육을 주도해오며 분에 넘치는 상업적 이익을 취해온 그룹에 속해 있는 그가 영어 공용어화를 주장하는 것을 보고 나는 마치 두 해 전 피해자를 가해자라고 우겨대던 경찰관의 모습을 다시 만난 것 같아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영어 공용어론이 나오게 된 직접적 원인은 분명히 말하지만 부실한 영어 교육 때문이다. 따라서 영어 공용어론은 그 타당성이나 실현 가능성을 떠나, 그 밑바탕에 그 동안 우리나라 영어 교육을 주도해온 사람들에 대한 강한 인책론을 수반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마치 영어 공용어화를 실시하지 않아 우리나라 영어 교육에 문제가 생긴 것처럼 주장을 펴는 것을 보니 측은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책세상으로부터 ‘영어 공용어 논쟁’을 정리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담은 책을 출간하자는 제의를 받게 되었다. 그 동안의 논쟁이 본말이 전도된 채 소모적으로 흐른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해온 나로서는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 영어 공용어 논쟁의 실체를 국민들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희망이 나의 부족한 능력 때문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럽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그 동안의 소모적인 논쟁을 극복하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어본다.
'저서 소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스퍼슨의 영문법교육을 생각함>-2002년 태학사 (0) | 2009.07.02 |
---|---|
John Maher의 <Introducing Chomsky> 번역 (0) | 2009.06.29 |
<영어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1998년 태학사 발행 (0) | 2009.05.26 |
<한국인을 위한 영어발음 교과서>-2001년 테스트뱅크 (0) | 2009.05.26 |
<영어 관사의 문법> (0) | 2009.02.24 |